내 나이 서른둘. 내가 성인 ADHD라니...
엄청난 우연이었다. 우연히 보게 된 유튜브 영상과 댓글로 '나도 혹시 ADHD 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솔직히 영상에 나오는 분들의 증상을 보며 일부는 공감하고 일부는 공감되지 않았는데, 이는 이분들이 나랑 다른 유형의 ADHD였기 때문인 것 같다.
ADHD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 과잉 행동이 강한 과잉행동/충동 우세형
- 주의력 결핍이 우세한 부주의형
- 두 증상이 혼재된 혼합형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ADHD 하면하면 1번처럼 금쪽같은 내새끼에 나올 법한 산만하고 과장된 행동을 주로하는 아이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영상 속 여자분처럼 어린 시절 수업시간에 수업에 집중을 못하고 자주 멍을 때리거나 공상을 하는 것, 남에게 피해를 주진 않았지만 준비물을 깜빡한다거나 잦은 실수를 하는 것 등의 행동과 같은 조용한 ADHD는 어린 시절에 ADHD로 발견되기가 힘들다. 성인이 되어서도 본인이 그 문제를 명확히 인지하고 개선하기 위해 방법을 찾아 나서지 않는 한 발견되기 어렵다고 한다. (이 정도는 남들도 다 그럴 텐데 뭐.. 하고 생각하는 것조차 ADHD의 특징이라고 한다.)
성인 ADHD를 판단하는데 가장 큰 지표가 바로 '어릴 때 ADHD증상이 있었는가?'인데, 어린 시절 생활기록부는 대체로 담임 선생님이 되도록 좋은 말만 남겨주시는 경향이 있기에 ‘산만함’, ‘수업에 집중을 하지 못함’과 같은 기록이 있다면 빼박 ADHD였을 것이라 한다. 차라리 이렇게 과잉행동/충동성 우세에 속해 어릴 때 눈에 띄었다면 주양육자에게 조기에 발견되어서 '치료'가 될 수 있었을 텐데, 30대를 넘겨 이미 뇌가 다 자라 버린 나는 더 이상 ADHD에서 '완치'라는 경험을 할 수 없다. 그저 평생 약물과 인지 행동 치료를 병행하며 개선해 나갈 뿐.
영상을 보면서 나랑 비슷한 부분이 일부 있었지만 일부는 다른 모습이기에 내가 ADHD 일 것이라 확신하지 못했는데 저 댓글을 읽고 나서는 의심이 작은 확신으로 바뀌어 버렸다.
- 이유 모를 멍과 스크래치 (가끔 언제 부딪혔는지 모를 멍과 일주일에 한 번은 스크래치가 생기는 손)
- 발 헛디뎌서 발목이 꺾이는 일 (자주 발을 헛디뎌서 발목을 삐끗하고 인대도 두 번 늘어났다)
- 깜빡 잊어먹는 것
- 대화중 집중력이 흩트려지면 귀로 들어온 말이 다른 귀로 빠져나가는 것
- 기억을 못 하는 것(한 번 습득한 정보나 지식이 시간이 지나면 가위로 도려낸 듯 기억이 사라짐)
저 댓글에만 벌써 다섯 개가 공감이 되어서 이 정도면 각 잡고 적어보면 훨씬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몇 시간에 걸쳐서 유튜브에 ADHD 관련한 모든 영상을 찾아보며 ADHD의 공통된 특징들을 수집해서 내 모습과 비교해 적어보았다.
병원 방문 전 혼자 적어본 자가검진
[매우 잦은 빈도]
1. 남의 말이나 이야기를 재밌게 듣고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려 하면 60%밖에 기억이 나지 않음. 비슷한 맥락으로 영화를 재밌게 보고 나서 스토리를 이야기하려 해도 기억이 안 나서 큰 사건 정도만 설명 가능
: 친구와 이야기할 때 어딘가에서 보고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도, 심지어 내가 직접 겪은 상황조차도 정확한 말이 기억나지 않아서 '(횡설수설하다)대충 이런 맥락으로/뉘앙스로 이야기했었어' 하며 이야기를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 부분은 1년 사이에 친구와의 대화에서 빈번하게 나타나서 스스로도 너무 답답하고 의문이었던 부분이었는데 알고 보니 이 또한 많은 ADHD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또한 초집중해서 이해하며 재밌게 본 영화도 '재미있었다'는 기억만 남을 뿐 어떤 내용인지 구조화하여 조리있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2. 간단한 암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시간을 들여 외웠음에도 긴장하면 백지가 됨
: 2년 전 직종을 전환하면서 중요한 입사 면접을 앞두고 있었는데 고작 1분 자기소개 내용을 외우는데 반나절 이상 걸렸고 실제로 내가 원하는 정확한 워딩으로는 암기하지 못했다. 입사해서도 승진 심사를 앞두고도 이틀 동안 면접 스크립트를 달달 외웠음에도 결국 제대로 외우지 못해서 면접 때 엄청 당혹스러웠다. 일련의 사건들로 나는 머리가 정말 나쁜 사람인가 보다.. 하며 스스로를 자책하며 괴로워했었다.
3.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다. (지각을 자주한다)
: ADHD특성 중 과몰입으로 무언가에 집중하느라 늦게 자거나 충동성을 절제하지 못해서 게임이나 영상 보느라 늦게 잔 다음날은 두말할 것 없고, 전날 아무리 일찍 자더라도 일찍 일어나는 것은 항상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 5분씩 늦는 일이 제법 많았다. 늘 '아 5분만 일찍 일어났어도..' 하며 후회를 하지만 매일 난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4. 학원 수업을 들으면 최대한 집중해서 들어도 선생님이 abcd를 순차적으로 보여주면 뒤이어서혼자 학습할 때 a혹은 ab까지밖에 기억을 못하는 경우가 많음
: 최근에 cinema4 D 툴을 배우기 위해 학원을 다녔었는데, 툴 자체가 원체 어렵기도 했지만 분명히 선생님의 수업을 들을 땐 분명 머릿속으로 이해를 했고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곧이어 실습의 시간이 주어지자 1분 전에 선생님이 설명해준 과정이 절반밖에 생각나지 않아 항상 선생님의 도움으로 마무리 지어야 했다. 단순히 툴이 어려워서라기엔 수업의 2/3 학생들이 잘 따라가고 있었어서 이건 내 문제구나..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놓치게 된 다른 이유는 디테일에 집착하느라 다음 설명을 놓치는 것도 큰 이유였던 것 같다. 모양이 조금 어설퍼도 적당히 마무리 짓고 바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어야 했는데 '조금만 더' 하다 보니 초반 설명을 놓쳐서 후반 설명까지 완전히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잦은 빈도]
5. 이것저것하다가 딴길로 새다가 결국 마무리 못지음
: 디자인 아티클을 읽다가도 모르는 단어나 개념이 하나 나오면 그거 알아보다 관련 아티클 찾아보고 그러다 갑자기 다른 주제로 관심이 튀어서 처음에 하려던 건 온데간데 없어진다. 그래서 결국 마무리를 짓지 못하게 된다.
6. 성가시거나 머리를 많이 써야해서 어려운 걸 해야하는 상황이 오면 딴짓에 한눈 팔려서 최대한 미루고 회피하다 더이상 물러설 수 없을때 해치운다.
: 다행히 일적인 부분에서 내가 미루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남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상황이면 절대 미루지 않지만, 개인 작업 혹은 포트폴리오 작업 같은 상황에선 대체로 내가 해결하기 힘든 부분에 부닥치면 회피하고 찝찝한 마음을 품은 채 딴짓을 하곤 한다. 그래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때 시작해서 시간 부족으로 완성도가 떨어지게 된다.
7. 단순작업을 하면 집중해서 하다가 갑자기 졸고있다.
: 머리를 크게 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디자인 작업일 땐 비교적 집중을 잘하는 편인데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졸고 있을 때가 많다. 때때로 데드라인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졸 때가 있어서 '이 와중에 존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8. 오래 앉아있거나 가만히 있어야 할 때 손을 만지작하거나 가만히 앉아있으면 좀이 쑤심
9. 해야 하는 건 반드시 지금 즉시 해야 즉성이 풀림. 해야한다는 충동을 참을 순 있지만 그 순간 잠시 매우 스트레스를 받음.
10. 게임이나 술에 빠지면 한동안 엄청 함.
11. 저축을 잘 못함. (자잘한 금액 지출, 충동소비로 과소비) 12. 영양제나 약을 진짜진짜 잘 못챙겨먹음 13. 책상이 항상 어지럽고 정리정돈을 못함
14. 한번 습득한 지식이나 기술이 조금만 시간 지나면 생각이 나지 않는다.
: a. 수영을 두 번 정도 배웠었는데 항상 음파음파 기초 수업부터 들어야 했다. 분명 배울 때 3개월간 열심히 자유형-배영까지 배웠는데 몇 년이 지나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건지... 신기한 일이다.
b. 일주일 전에 두어 번 만든 요리였는데 일주일 뒤에 그 레시피가 기억이 나지 않아 또다시 유튜브를 켜서 레시피를 보며 만들고 있다.
15. 사람 말을 한번에 못알아들어서 네? 네? 이러는 경우도 많고 세네번 말해줘도 안들릴 때가 있음
: a. 좋지 않은 습관 중 하나인 것을 알지만 나도 모르게 네? 하고 되묻고 있다. 이런 경우는 대게 내가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갑자기 말을 걸면 이렇게 되묻곤 했는데, 입 밖으로 "네?" 하고 되묻고 나서 3초 뒤에 내용이 인식되어서 "아, ㅇㅇㅇ하신 거 맞으실까요" 하고 말을 하게 된다.
b. 가끔 상대의 말이 웅얼웅얼하듯 들려서 알아듣지 못하고 세네 번씩 되묻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세네번까지 물어본 경우는 결국 끝까지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아서 업무 관련된 말이 아니라면 적당히 알아들은 척하고 넘어가게 된다.
[가끔] 16. 대화를 하다 갑자기 눈앞이 핑도는 느낌이 들거나 머릿속이 붕-뜨는 몽롱한 느낌이 들면서 말이 한쪽 귀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집중해서 듣다가도 갑자기 집중력이 흐트러져 중요한 정보를 놓칠 때가 있음
17. 비 안오는날 우산 들고나가면 세 번 중 한 번은 꼭 잃어버림
: 저녁에 비가 예보되어 아침에 우산을 챙겨갈 때, '이 우산은 이제 내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나간다. 당장 우산을 펼쳐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버스에 우산을 걸어두거나 음식점에 우산을 두고 나와서 멀리 이동하고 나서야 비로소 생각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 그래서 이제는 갑자기 비가 오면 편의점에서 살 생각으로 우산을 챙겨나가지 않는다.
18. 이유 모를 멍이 가끔 드는 것 / 발 헛디뎌서 발목 꺾이는 것 등(1년에 한 두번한두 번)
[기타] 19. 고등학생 때 몇 주 전부터 주말마다 밤새워 공부하지만 조는 시간이 많고 꼭 공부하다 날잡고 하루 방청소를 하느라 시간을 버림. 항상 투자한 시간대비 결과가 좋지 않음. (대학생 때도 마찬가지)
20. 좋아하는 걸 할땐 밤새기 가능(초등학생 때부터 그랬음) 21. 고등학생 때 언어 시험치면 긴장하고 시간에 쫓기니 초조해서 지문이 안읽힘. 심한 경우 그 지문을 4,5번 까지도 읽어도 지문 파악이 되지 않아 더 이상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고 문제를 찍은 적도 있다. (내용 자체의 어려움이라기보다 말 그대로 지문의 내용이 머릿속에 산발적으로 들어오는 느낌)
22. 인정욕구가 강하고 부정적인 피드백 들으면 자책감이 들거나 의기소침해지고 기분이 급격히 안좋아짐
23. 어릴 때부터 문장력이나 어휘는 나이에 비해 풍부하여 짧은 글(한 문단)은 제법 완성도 있는데 장문의 글을 잘 못씀. 문단간에 매끄럽게이어지는 느낌이 들지 않음(아동 adhd 전형적 증상) 24. 몸치인 이유가 눈으로 동작을 못따고 기억을 못해서 춤을 배우는게 너무 힘듦
25. 말을 장황하게 함. 말을 구조화해서 조리있게 하지 못해서 항상 사족과 tmi를 남발하며 이야기하다 "근데 내가 무슨말 하려 했지?" 하고 길을 잃는 경우가 자주 있음
보고 들은 것을 구조화해서 입 밖으로 내는 것이 어려운 것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암기가 되지 않는 것.
맨 위의 1,2번이 최근 1~2년 사이의 나를 괴롭고 힘들게 했었는데 이게 다 ADHD의 증상이었다니.. 너무 후련하면서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성인ADHD를 인지한 시점부터 주말을 내리 성인 ADHD와 관련한 영상과 정보를 찾아보며 자가진단을 하면 할 수록 마음 속에서는 의심이 점차 확신으로 바뀌었고, 월요일이 되자마자 바로 병원을 알아보고 검사를 받았다. (우습게도 궁금한걸 못 참고 당장에 병원을 알아보고 검사를 받으러 가는 모습조차 ADHD증상이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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